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왕의 공식 명칭이다. 이장에서는 광개토왕의 업적과 치적을 통해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태왕임을 살펴보게 됨으로써 고구려가 중국의 부속국이거나 속국이 아닌 진정한 독립국가로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 더 나아가
광개토대왕은 374년 고구려 고국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384년, 소수림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고국양왕이 즉위하였으며 그로부터 2년 뒤, 386년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391년, 아버지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전대의 왕인 고국원왕
1.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재위기간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
업적을 강조한 명칭이다. ‘平安’은 왕의 태평성대에 대한 칭송인 듯하고, ‘好太王’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왕에 대한 최대한의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好太王’은 광개토대왕뿐만 아니라 고구려 왕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되는 미칭이었다. 이런 식의 시호를 받은 왕은 광개토왕이 처음이다
광개토왕의 치적에 대한 총평, 산릉의 축조와 능비 건립의 목적을 쓴 것이다.
제 2단(제1면 6행 37자~제3면 8행 15자, 총 897자)은 광개토왕의 공훈, 업적을 연대별, 사건별로 서술한 것으로서 북방으로는 비려, 식신, 동부여를 정벌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영토를 크게 넓힌 사실, 남방으로는 백제, 가야, 왜
광개토경’을 호에 넣었다. 그리고 ‘평안’은 그의 훌륭한 내치(內治)를 기린 것이며, ‘호(好)’ㆍ‘태(太)’ 등의 호는 24대 양원왕(陽原王)을 양원상호왕(陽原上好王), 25대 평원왕(平原王)을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이라고 한 것이나,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예(『삼국사기』)에 비추어 보면 왕을
광개토왕이 순시차 평양성에 갔더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에 가득히 들어와서 城池를 파괴하고 있으니 구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마치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정한다는 것이다. 이엉 영락 10년인 400년에 5만의 대
광개토왕비문의 세계> p255~256
Ⅲ.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정복활동과 대외관계
1.정복활동
광개토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 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